적대의 은어

 * 본 고는 퍼블릭 아트 2020년 10월호에 게재된 권태현의 <변화의 키워드:

프로그램 교차되며 확장되고, 어긋나며 연결되는 순간들>에 대한 메아리입니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인간의 말은 여러 가지 해석에 달라붙는다. 상찬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해석이 동등한 설득력을 지닌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주장에 쏟아질 뻔한 반응들은 이미 지겹다. 텍스트는 각자의 보기를 드러내는 점에서 중요하고, 위계란 없으며, 취향이 존재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여러 빛깔 언어들. 상대주의의 절대성이 우리를 야멸차게 대하는 동안 그것의 위장은 자신을 향해 있는 칼끝 위로 드리운다. 비평에 정합성이 있으며 상대적이지 않은 위계 또한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대주의 안에서 은폐되어야 하는 명제로 남아있다. 비평이 정말로 각자의 관점적 소산일 뿐이라고? 우린 동의 못한다. 상대주의가 틀렸다면 우리는 차라리 저 반대항으로 달려간다.

 

  말의 힘이 상실된 시대라고 웅성거리면서도 너무 많은 말들이 두런거린다. 말의 효험을 체감할 수 없는 시대라면 차라리 말을 으깨버리자. 오늘 권태현의 텍스트를 모루에 올린다. 권태현의 여러 텍스트에서 항시적으로 등장하는 낱말들은 다음 몇 가지들이다. 교차, 연결, 적대, 솟아오르는... 그가 말하는 언어를 증상으로 간주해보면 어떨까. 앞의 낱말들이 그의 다른 여러 비평들에서도 항시 등장하고 있으니 분명 심상치 않다. 비평이 작품에 따라 내적인 모티프를 부각하고 도야하지 않고 어떤 비평에서도 자꾸 교차, 연결, 확장의 세 겹 매듭을 묶고 있다면 무언가 의아하지 않은가. 비평이 사변적 테크닉이거나 작업이 이론의 징검다리가 아니라면 지양되어야 할 태도임이 자명하다.

 

교차와 확장

  퍼블릭아트 10월호는 special feature에서 임근준, 이한빛, 권태현, 정일주, 최태만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관해 이야기했다. 권태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사회적 네트워크상에서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공간이면서도, 스스로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면서 변화를 꾀하는 공간으로 놓았다. 그는 미술관이 참여와 논쟁의 공유지로 변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전시와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관을 보는 관점을 벗어나 미술관이 자기 안쪽으로 다른 존재들을 불러들이는 순간, 미술관의 공공 프로그램에 관해 주목한다. 특히 다원예술 프로그램은 교차와 확장에 관한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지목된다.

 

  이때 권태현은 다원예술에 대한 칭찬을 마디마디 계속하며 그것이 가져온 성과들을 나열한다. 14년의 국현은 존 케이지의 무잔향을 통해 사운드 아트, 현대음악, 미술의 교차를 보여주었고, 16년엔 국립현대무용단과 <예기치 않은>을 기획해 타 예술기관과 협업을, 17/18년은 김성희의 <페스티벌 봄>이 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케이르스마커 <바이올린 페이즈>를 서울박스에서 펼쳐냈으며 국제 여러 작가들의 신작을 공동 제작해 선보인다. 이 작업들은 다른 지역 무대와 전시장에도 오른다. 농당스, 포스트드라마 시어터 또한 중요하다. 필름앤비디오도 시네마와 포스트시네마의 관계를 탐색하기에 중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차라리 어떤 일도 가능한 공간처럼 보인다. 매체 자신의 형식적 경계야 이미 우스워진 일. 어떤 장르도 매체도 가리지 않고 둥지로 끌어들여 교합을 벌이는 광경은 심지어 성애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권태현이 보기에 그것은 교차와 확장이고, 내가 보기엔 탐욕스럽고 때론 추하다. 요사이 추세는 이런 상이한 지점들 사이에서 각자의 손을 모두 들어주는 것으로 양자를 성급하게 화해시키려 한다. 이조차 교차이고, 확장이다. 가치중립적 사유는 그럴 때 정신을 상호 간의 충돌 없는 공허 속으로 몰아넣으며, 사유는 이 긍정 속에서 무화되고 질식한다.

 

  어느 틈엔가 세상은 사이비 차이에 대한 긍정으로 포화되어버렸다. 나는 조금 불만스럽고 시끄럽지만 그래도 활기를 불어넣는 사람 정도로 납작하게 눌려버린다. 권태현은 이 글이 게재된다면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타임라인으로 공유해서 대범해질 수도 있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훌리건이 되고 싶은 나에겐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이다. 바로 여기가, 비평이 표류하는 지점이다. 이는 비평에 관한 자유주의적 흐름과 일치한다. 동시대 비평가들이 비평을 써내려가는 방식은 대개 ‘형식과 효과’라는 프레임 안에서이며, 비평은 형식으로부터 파생되는 효과 몇을 자신의 관점으로 취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흐뭇해한다.

 

  왜? 비평이 좁디좁은 사유의 차원에 머물고 있으니까! 비평가들에겐 그곳이 답답하긴 커녕 무척 아늑한 모양이다. 객관적 현실과 동조하고 현실을 꿈쩍이라도 하려는 비평이 생산되지 않고 있다. 형식을 통해 일어나는 효과들을 상대주의 안에서 긍정하는 흐름들의 연쇄는 호화로운 언어의 벙커에서 근친하는 종말론적 퇴폐를 상연한다. 각자는 인격으로 만나고 또다시 만나기 위해 흩어진다. 우리는 9월호에서 만나고 헤어진 뒤 10월호에서 결집한다. 어제는 아트인컬쳐에서 만났다면 내일은 퍼블릭아트에서 만난다. 기획자로 만났다가도 비평가로 만나고, 관객으로 만났다가도 패널로 만나며, 독자로 만났다가도 편집자로 만난다. 이런 와중에 생산되는 비평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커녕 별을 솎아내고 성좌를 구상하지 못하게 교란하는 광공해가 된 건 아닌가?

 

  비평이 작업들을, 그리고 작업을 둘러싼 제반의 환경들을 파생현실적인, 어떤 모티프로 대할 회로를 잃어버리면서 인식을 얻어낼 수단으로써의 위력도 상실하고 있다. 비평은 이제 각 작업이 다른 작업에 비해 갖는 미묘한 차이를 기술하는 것을 자신의 동일한 목표로 삼는다. 학적부를 적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털끝의 장점이라도 찾아내고 긍정하는 포트폴리오를 쌓아가려는 요상한 현실이 비평을 옭아매고 있다. 가장 순수하게 악한 자들은 그것을 한껏 긍정하고 이용해서 더 많은 지면에 자신의 문자를 퍼다 나르는 비평가-보부상들이다. 세상 따분한 작업조차 그들의 손을 거치면 막강한 아우라가 코팅된다. 비평은 이제 차라리 요술봉으로 화해 현실이 아닌 오만가지 환상을 묘사한다.

 

  그 환상은 비단 개개의 작업에만 한정되지 않고 미술관, 나아가 미술계가 작동하는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현대미술이 벌거벗은 왕의 신화를 지키려고 총력을 다하는 마케팅 게임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루하게 드러났다. 예술이 자기 내부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기관은 누가 뭐라건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생존과 허구를 위해서 시장의 마케팅을 기민하게 흡수하고 활용한다. 말표 구두약이 맥주를 내놓듯, 요구르트가 젤리가 되듯, 곰표가 가방이 되고 육개장이 포테이토칩으로, 꽃게랑이 라면으로, 메로나가 넥타이가 되듯이 교차되고 확장되는 상품들의 트랜스폼을 충실히 반영하듯 결과는 시장에 맡긴 채 끊임없이 자신의 외관을 변조하고 꿀렁거린다.

 

  작년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교차라면 2020년 9월에 열린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어떤 타자도 포용한다는 자신의 허구를 충족하기 위해 개를 제물로 삼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술관은 개만도 못한 인간들을 문법적으로 생성해낸다. 하지만 이는 역시 효과 차원에서의 관점적 기술에 국한되는 일이다. 전시는 자체적으로 평해질 게 아니라 현대자동차의 그랜저 광고와 레이어를 겹쳐야 한다. 반려동물 산업 규모가 2027년 6조로 전망된다는 펫코노미(Pet+Economy)의 부상과 더불어 시각적, 미학적 분야에서도 동연적인 흐름이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다.

 

출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익히 알겠지만 그랜저는 중산층의 생활상을 구성하기 위해 제시된 사회적 기호로 존재한다. 그랜저가 자신을 어필하는 부분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그런 식이었다. 어떻게 사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랜저로 답했다는 전설적인 광고는 그랜저를 단순한 차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성공을 대변하는 사물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한국-남성-중산층을 표지하던 그랜저는 21년 광고 <성공에 관하여 "유기견 입양">에서 어떤 탈피를 시도한다. 한 여성이 등장하고, 그녀의 핸드폰 액정엔 딸로 짐작되는 아이와 개가 있다. 화면을 본 다른 여성은 “소윤이 동생 생겼네요?”라고 묻는다. “동생이 아니라 언니”라는 대답은 덤.

 

  30초짜리 광고에서 차가 등장하는 시간은 불과 10초. 그마저도 차가 전면에 부각되는 시간은 4초, 나머지는 유기견을 입양하고 챙기는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데 소요된다. 중산층의 이미지를 컨설팅하는 그랜저의 광고에서 유기견을 입양하는 일이 어쩐지 미심쩍은 건 나뿐일까. 낯선 타자보다 차라리 자신이 애정을 투사하는 동물에 더 집중하는 분열된 세계. 유기견은 가족이 될 수 있지만 난민은 수용될 수 없는 세계. 그랜저는 그 세계의 한가운데서 차를 판매하지 않고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과 윤리를 구성하고 주입한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회군하자.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와 함께 전시를 관람할 수 있던 이유는, 권태현의 주장대로 다른 존재들을 위한 자리를 두어 교차와 확장의 가능성을 묻기는커녕, 개를 키울 정도의 재산 내지는 시간이 있으며 미술관을 방문할 만한 교양이 있는 중산층이라는 협소한 프레임만을 여전히 ‘관객’으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무척 유쾌한 시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저분하게 사족을 달자면 이와 같은 미술관의 기만은 인류세를 실컷 전도하던 자신의 입장과 전면으로 충돌한다. 유기견이 미술관에 제 발로 찾아든다면 어떨까? 가엾게도 쫓겨나거나 더욱 안쓰러운 전시 홍보용 스펙터클로 활용될 것이다. 이때 견주-애견이라는 반려 관계의 허상이 드러나며 미술관은 주인-사물의 관계를 밀고하게 된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전시명은 쉽게 속기도 어려운 기만이다. 어울리는 제목을 이제서야 밝힐 테니 누가 됐던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러주기를. 전시는 ⟪견주만을 위한 미술관⟫이라고 명명되어야 개를, 모두를 농락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전시에 관한 가장 적확한 부정이라면 권도연의 <북한산> 연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사진 작업은 도시 개발에 의해 북한산으로 밀려난 야생견들의 삶을 조명한다. 북한산의 개들은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계속해서 포획되고 처리된다. 따라서 북한산은 개와 사람이 서로를 위협적인 존재로 마주하는 공간이다. 이 긴장을 포착하는 권도연의 연작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내건 허상을 관통한다. 타점은 여기가 아니었으니 이쯤하자.

 

권도연, <북한산> 사진출처: https://www.hani.co.kr/arti/PRINT/919941.html

 

적대와 연결

  권태현이 즐겨 소환하는 인물로 라클라우와 무페를 빼놓을 수 없는데, 민주주의가 내부의 적대와 함께 존재한다는 그들의 논의를 긍정하기 때문이리라. 권태현은 이때 민주주의 가능성이 ‘솟아오른다.’고 말한다. 허나 이 구호는 권태현의 텍스트 구조 안에서 그의 역린을 구성하는 낱말로 전치된다. 라클라우와 무페에게서 적대의 개념은 사회의 완결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질적인 한계이며, 이데올로기가 전체화할 수 없게 만드는 궁극적인 실패를 상징화하는 트라우마적 부정성이다. 적대는 그 파열을 담지하고 통일된 사회상을 언제나 어긋나게 만들기에 적대를 추종하는 자의 글쓰기라면 응당 대상을 빗금치거나 괄호 속으로 집어넣는 적대를 발견하려 힘써야 한다. 하지만 권태현의 비평에는 긍정의 과잉만이 자리한다. 그의 비평을 마름질한다면 적대라는 낱말을 끄집어내야 비로소 앞뒤가 들어맞게 된다.

 

  그의 비평에는 얄궂게도 그가 긍정하는 적대가 없다. 일관되게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거대한 기관이 뒤뚱거리며 가는 바를 긍정할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교차와 확장은 이데올로기의 전체화라고 여길 만한 요소가 다분함에도. 여기서 발생하는 한 가지 역설은 적대가 텍스트 구조 안에서의 불필요로 인해 반드시 동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이데올로기를 검토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다. 익히 알다시피 이데올로기의 허구란 단순히 그것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일련의 조작적 메커니즘을 탐색하면서 소급적으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텍스트 안에서 공허하게 자리하는 ‘적대’가 수행하는 효과를 찾아내야 한다.

 

  그는 적대를 에드거 앨런 포의 <도난당한 편지>처럼 누구나 척 볼 수 있는 위치에 놔둔다. 이때 감추는 것은 자신 내부에 ‘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배후를 상정하는 폭로가 아니다. 권태현은 자신의 긍정을 상쇄하는 안티-낱말을 텍스트 안에 병치함으로써 결여를 감추는 왜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스스로 빈혈 상태에 빠뜨린 그 적대를 통해 진보의 엠블럼마저 획득하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작업도 긍정하는 경구를 내놓는 비즈니스맨이 되는 동시에 적대 또한 함유한 비평가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모델은, 권태현의 텍스트 안에서 조율되고 있다. 이때 녹아내리는 것은 물론 적대의 부정성이다. 적대는 전체의 완결성을 부정하는 조각에서 긍정적 전체를 보완하는 카운트 파트너로 ‘추락한다.’

 

  그렇기에 권태현의 비평은 적대를 빠뜨릴 때 완벽해지지 않는다. 외려 적대를 그려 넣음으로써 완벽해진다. 권태현의 적대가 표상하는 것은 동시대 비평 환경에서의 ‘적대’의 불가능성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동시대의 상징적 지판으로 기입된다. 그의 거의 모든 비평에서 적대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강박에 가깝다. 이것이 아버지의(왕의, 비평의, 예술의!) 무능을 감추려는 강박증자의 대리된 희생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의 텍스트는 아버지의 약점을 자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아들의 신경증이다. 선택된 낱말이 하필 적대라는 사실은, 그럼에도 적대를 지향하고자 하는 슬픈 비전을 내포한다. 이 과잉은 결핍을 감추려는 익숙한 보상 체계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권태현의 텍스트 안에서 남용되는 적대는 역설적으로 적대를 고려해 짜인 물신적 환상언어인 셈이다.

 

적대!

  동시대 비평의 결정적 약점은 스스로의 생산이 미술 관료제 시스템에 기대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평에 관한 지원은 빈약하지만, 그 빈약함이라도 탈취하기 위해 여러 비평가들이 분투하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 사업’ 선정을 두고 기성 비평가들이 내놓은 낯 뜨거운 불평들을 기억한다. 하 참내, 그게 아니라손 쳐도 누가 감히 기성 비평가들을 공격하겠습니까? 그분들께서 언제 저의 심사위원님이 될 줄 알겠습니까? 어느 비평가들을 감히 비판적으로 검토하겠습니까? 그분들이 열이 받아서 저만 쏙 빼놓고 재밌는 기획들을 벌이면 저는 어쩐단 말입니까. 어떻게 작가들을 비판하겠습니까? 그분들이 공모전을 통해 따낸 기금으로 기획자를 꼽을 때 저를 빠뜨리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몇 명이나 이 글을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를 수 있겠습니까?

 

  윤원화는 아트인컬처 20년 8월호에 실린 자신의 비평 중 ‘출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미술비평가의 존재 이유를 비평가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술제도의 변종인 미술관료제 시스템이다. 여기서 미술비평가의 기능은 ‘심의’, ‘정성 평가’, ‘멘토링’, ‘컨설팅’, ‘사업에 관한 전반적 의견’ 등으로 명시되고 비평의 공간은 여러 겹의 공문서로 에워싸인 한글 파일의 한 칸으로 구획된다. 그 내역은 사업 성과를 보고하는 자료집으로 출판되어 캐비닛에 보관되고 개별적으로 미술가의 책에 수록되거나 웹 사이트에 발췌된다. 문서가 전시를 낳고 그것이 다시 문서를 낳는 이 프로세스는 놀라운 속도로 비대해져서 일종의 카프카적 미궁이 된다. 작가 노트, 비평, 또는 그저 대화의 형태로 존재하던 말들이 전부 시스템에 필수 절차로 등록되고 증빙되며 그것이 누적되어 다시 개인과 기관에 대한 평가로 합산된다. 그 속에서 순환하는 말들은 관리자의 언어로 수렴한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의 일은 공통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분리된다.”

 

  여기 권태현이 그간 동어반복해온 모든 텍스트들의 적대적 텍스트가 있다. 이는 상대주의적 틀 안에서 어떻게 수렴될 수 있을까. 서로 상관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니면 양 텍스트 간의 미묘한 차이를 긁어모아서 부정하는 방식으로? 어쩌면 모든 것이 괜찮으면서 최상의 승리로 차이는 영생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권태현의 부정문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