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검열

눈엣가시가 최상의 확대경이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를 건 투쟁을 역사 내내 지속하는 동안, 검열은 한켠에 도사린 채 호시탐탐 글쓰기를 베어 먹으려 했다. 소음 없는 세계를 향유하려는 욕망은 검열로 둔갑해 초인종을 누른다. 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인가? 당신이 속한 사회의 의미구조를 결정하고 관통하면서 전체 장을 뒤흔들기 때문에. 한 톨의 재산도 지위도 없는 이라 하더라도 한 문화권에 속한 이상 언어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공민권이다. 사태를 표지할 언어를 제거할 때 세상은 변화 없이 흘러갈 것이기에 언어를 강탈하고 길들이려는 시도는 지칠 줄을 모른다. 누군가는 언어마저 앗아갈 셈이냐고 소리칠지 몰라도, 바로 그 언어가 중요하다.

 

  어쩌면 당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를 둘러싼 국선즈 이후 식어버린 낱말에 부싯돌을 켠다며 심드렁하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글쓰기가 자신의 지류로부터 대양까지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검열도 길목마다 거듭 형태를 바꾸어 귀환한다. 자신의 항상적인 적대가 어떤 형식을 취하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자못 중요하다. 여기서 작년에 일어난 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오늘날 일어나는 검열의 형태는 무엇인지 논하고 나아가 글쓰기를 위한 새로운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17년부터 《크리틱-칼》이라는 매체를 통해 비평 활동을 거듭해왔다. 기획이나 청탁을 통해 원고를 쓰기도 했지만 원고료의 지급에 따라 부과되는 듯한 모종의 도덕률이 싫어 걸핏하면 청탁을 걷어차며 《크리틱-칼》 기고를 선택했다. 작년 8월엔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을 오마주한 일본 만화에 관한 비평문을 작성했었다. 내심 그 만화가 그 어떤 저작물보다도 아브젝시옹에 관한 논의를 팽팽히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크리틱-칼》의 발행인(그의 페이스북 명시를 따름) 홍태림은 게재 거부를 통보하며 다음 조건을 수용하는 선에서의 조건부 게재를 요구했다.

 

1. 저작권 문제에 기인한, 표지 제외 원고에 첨부된 모든 이미지의 제거

2. 청소년 관람 불가 이미지의 제거 (표지를 제외한 모두)

3. 원고 내의 몇 가지 표현 순화

 

  당연히 마찰이 일어났고 원고는 실리지 못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내 쪽에서 “그럼 게재하지 않겠다”는 항복 선언이 기어 나왔다. 사태는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복심이 불어나 사태가 글을 쓰라 종용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원고가 거절되리란 상상은 차마 한 적이 없다. 《크리틱-칼》이란 매체는 자격, 주제를 제한하지 않는 공론장을 지향함이 특장이고, 홍태림도 수시로 그 점을 강조해왔다. 더욱이 그는 검열과 블랙리스트에 관해 목소리를 내온 인물이다. 사건 이후, 그는 한예종 총학생회 ‘불꽃’의 초대를 받아 ‘예술계 검열과 탄압’을 주제로 강연했다. 아울러 수차례 블랙리스트 국가 책임 촉구 1인시위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원고 거부와 관련해 다음 가정들이 가능해진다.

 

1) 검열과 블랙리스트 철폐를 필두로 활동하던 홍태림은 사실 관련 지식이 전무하다.

2) 홍태림은 엄제현의 원고를 거부한 일을 검열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3) 홍태림과 《크리틱-칼》 사이에 어떤 불화가 시작됐다.

1)은 홍태림을 바보로 아는 격이고 2)는 미심쩍으며 3)이 차라리 그럴 듯하게 들린다. 지금부터 예민한 논의들을 다룸에 따라 원고의 방향은 둘로 분절되니 부디 길을 잃지 마시라.

 

  바늘처럼 섬짓한 주제이기에 작은 가능성부터 검토할 것이다. 검열. 넓은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종류의 조치를 가리키는 이 낱말은 이념에 따라 몸집을 키우고 줄인다. 이때 글쓰기에 있어 금지와 금기는 중대한 표적으로 부상한다. 글쓰기는 금기에 도전하고 금지에 저항한다. 검열이 미풍양속을 시비로 두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글쓰기가 영토의 문제로 구체화되고 정치적 추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파문을 그린다면 검열은 진공 상태를 소망하며 글쓰기를 암흑 속에서 부유하는 탈운동 상태로 강제할 때 존재를 실감한다. 따라서 한 사회가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면 억압된 글쓰기를 찾아내야 한다. 구원은 언제나 문자의 외양으로 약속되어 왔으니.

 

  그가 이미지의 단속과 문장의 순화 요구를 검열로 생각하지 못했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어쨌거나 원고를 등록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의 입에서 뱉어졌기 때문에? 주체성에 관해 백치가 아니라면 이것이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 체험을 ‘백색 검열’이라 부르려 한다. 이전의 검열은 제니 홀저가 규명한 공백의 현시이다. 사라진/사라지는 것들이 더욱 많은 것을 말하기에 우리는 언표와 공백의 변증법을 통해 평면을 투과하는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 텍스트엔 구멍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세계가 자신을 상연하려는 몸짓과 일치한다. 마치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 보는 것의 전부인 듯.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듯. 그래서 시각에서는, 감각 수준에서는 체감할 수 없는 표백과 배제가 존재한다. 의미의 중심에 버젓이 똬리를 틀고 우주를 기만하는 검열.

 

  백색 검열은 미풍양속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고대로부터 행해진 검열과 맥락을 같이한다. 불온한 대상을 시야에서 금하려는 통치의 기술과 공통되며, 심지어 저 보기에 좋은 것들로 세계를 구성하려는 야훼의 부권적 욕망과 일치한다. 그러나 《크리틱-칼》의 뿌리는 그와 같은 경향을 거부하려는 몸짓으로부터 발원한다.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허용하고 그에 관한 말들의 연장을 지향하는 매체로, 홍태림이 나를 검열한 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사태가 문제시되지 않는다면 백색 검열은 또다시 발포될 여지를 남긴다. 그때 《크리틱-칼》에 남는 텍스트는 불온한 요소들이 사전에 제거된 백색 물감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들을 비평적이라 여길 수 있을까. 세계와 화음을 이루는 보표들이 된 텍스트는 얌전히 낭송되며 세계를 더욱 완벽하게 덧칠할 것이다. 백색 위에 백색, 다시 그 위에 백색.

http://art.chosun.com/m/article.html?contid=2020122302982

  위에서 홍태림이 내게 요구한 3가지의 문제들은, 정말 ‘문제’였는지 의심스럽다. 그는 너무나도 유창한 거부의 언어들을 구사했다. 어쩌면 그 언어는 거부를 위해서 제작된 게 아닐까. 원고를 거부할 생각으로 거부의 이유들을 제시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위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고민하는 일은 속는 일이 되겠지만 내파하는 일도 못내 중요하게 여겨진다. 세 가지 요구에 관해서(그때도 말했지만) 나름대로 답할 때가 왔다.

 

1. 저작권 문제

  처음에 그가 제기한 문제는 만화 상의 이미지들을 게재할 때의 저작권 침해 여부였다. 이는 그의 역할 상 합당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때 저작권 침해 여부를 이유로 원고를 게재하기를 거부한다면, 근거를 가지고 설득했어야 한다. 나는 비영리적인 사용의 경우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그는 “그건 너의 생각”이라고 일축하며 문예위 현장소통 및 공론화소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발생한 저작권 다툼의 예시를 들어가며 내 의견을 묵살했다.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법적 준거를 통해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토대로 이미지 사용의 문제 ‘소지’를 주장하며 등록을 거부했다. 그가 법적 문제를 우려 삼았다면, 처벌이 될 만한 관련법을 제시했어야 한다. 이는 그가 운영하는 《크리틱-칼》의 모토를 실천하기 위해서 부과되어 있는 의무이다.

 

제6조(편집저작물) ①편집저작물은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보호된다.

 

  저작권법 6조에 따르면 편집저작물은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보호된다. 여기서 비평이 만화의 이미지를 섞어 자신의 논지를 구축하는 것은 어떻게 통용될까. 내가 쓴 비평은 아브젝시옹의 논의를 경유하며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이미지의 조력을 요했다. 이미지가 인용이 될 때, 보는 것을 읽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비평의 일부 정의가 다시 쟁점이 된다. 이미지는 텍스트를 초과하는가 아니면 텍스트만큼 존재하는가? 나는 얼마간의 답을 손에 넣었고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 사유는 각자의 몫이기에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해서 게재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제6조로 돌아가자. 비평은 독자적인 저작물로 인정되어 이미지의 사용이 허용될까? 아니라면 비평은 자신의 지위 하나를 분실한다.

 

2. 청불 이미지

  그는 내가 비평 대상으로 삼았던 ‘죄와 벌’의 이미지들이 청소년들이 보기에 부적합하다 했다. 아울러 《크리틱-칼》은 성인인증 기능이 없으므로 게재할 수 없다 했다. 대안은 없었을까. 다음을 참조하고 같이 고민해봤다면 어땠을까. 아래는 시각예술 웹 저널 《SEMINAR》의 Issue 04 <하수관에 그냥 흘려보내도 된다 (You can just pour it down the drain)>의 머리글이다.

 

이 글의 시각 자료 중에는 인체 표본을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보기에 불편할 수 있으나, 역사의 단편에 신체를 내어준 고인에 대한 존중을 부탁드리며, 저작자의 허락 없이 복제 전제를 금합니다. 시각 자료는 글 해당 부분을 클릭하시면 새 탭에서 열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3. 원고 내의 몇 가지 표현 순화

  그는 내게 이미지 삭제와 더불어 몇 가지 단어의 순화를 요구했다. 그는 질액, 매춘부, 도끼 자국의 사용을 문제시했다. 《퐁》에 거부되었던 원고가 수정 없이 게재되어있기에 변호는 생략하겠다.** 정말로 해당 낱말들이 문제적이라면 문제로 적시될 것이다. 한 가지만 예로 들고 넘어가자. 도끼 자국은 왜 보다 ‘완곡한 묘사’로 깎여나가야 할까. <죄와 벌> 원작처럼 도끼로 노파를 살해하려던 주인공은 살해 도구를 남근으로 전치하는 장면이 만화 내에 삽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끼와 남근의 치환은 금지에서 쾌락으로 이행하는 지표적 오브제이자, 여성기를 두고 일어나는 하나의 언어 게임이기에 여성기의 은어, 도끼 자국은 명시한다고 해서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폐기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수긍했었다. 문제가 된다는 위 세 단어를 모두 고쳐 쓰겠다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부족한 내 감수성이 예민한 다른 결을 지각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시된 모든 문장들의 수정 의사를 밝혀도, 이미지에 관해 타협 않는 그에 의해 원고는 말소되었다.

 

리커버리

  세 번째 가정, 홍태림과 《크리틱-칼》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춤추기 시작했다면. 이때 사건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는 한국에서 익숙한 격언 하나를 연상하게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예술을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이들은 주체와 객체를 별도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연관성을 탐색하는 전반의 활동을 우리는 뭉뚱그려 예술 안으로 놓는다. 그래서 누구나 겁 없이 절에 저주를 퍼붓다가도 고쳐 쓰는 정신 나간 중으로 살아간다. 이때의 일은 비평적 실천에 관한 심각한 회의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으나 이대로 죽은 원고를 유기하고 사태에 침묵한다면 하나의 범죄가 영구한 미제로 남는 것은 물론, 예술 생태계가 기이한 부당함에 침범당하리란 우려로 움을 켰다.

 

  억압되고 추방당한 언어가 모습을 바꿔 되돌아오려 하고 있다. 일주일 뒤, 해당 원고 <백색 검열>은 《크리틱-칼》에 송부될 것이다. 이는 세 번째 가정에 관한 절차적 검증이다. 《크리틱-칼》의 운영 원칙상 이 원고는 반드시 실려야만 하는 원고이다. 이 원고가 거부된다면 세 번째 가정이 검증되고, 게재된다면 두 번째 가정이 검증된다.(원고가 거부된다면 나는 홍태림의 블랙리스트로 등록된다.) 부정하고 싶은 불쾌한 시간이 턱밑까지 왔다. 하지만 이 행위는 파괴라기보단 치유에 가깝다. 자신의 환부를 지각시킬 수 있는 하나의 진단서가 송달될 것이다. 《크리틱-칼》의 운영에 있어 홍태림이 문제가 된다면 홍태림이 바뀌던가 운영자가 바뀌어야 한다. 문예위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진 그에게 논란거리가 걱정이라면, 논란을 일으키고 사태를 다시 보게 만들어야 하는 비평 매체는 이제 홍태림을 내부의 독소로 의미화한다.

 

  어쩌면 원고가 아브젝시옹은 커녕 여혐으로 가득한 한남적인 텍스트이기에 거부되어야 했던, 고심 끝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창간자에 의해 매체의 효험이 무색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한 매체의 식물화를 뜻하지 않는다. 말들이 자신의 피난처를 잃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원고가 좌절되었을 때, 무시된 것은 단순한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무시된 것은 작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관한 주체의 자율적 능력과 결단이다. 이 숨어 있는 자유가 암살당했다. 그는 무엇을 보호하려고 했던 걸까? 대상이 무엇이던 보호를 명분으로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행해진 검열들의 가장 큰 변명이다. 바로 그 명분의 허상을 일깨우고 싶다. 그 내재적 기초와 숨겨진 규범의 판타지를 분쇄하고 《크리틱-칼》을 정상화 하고 싶다. 그게 내가 가진 예술계의 지분이고, 《크리틱-칼》의 필자로서 몇 년을 함께해온 동반자적 소망이며, 언어를 가진 이로서의 공민권의 발효이다.

 

  언어에게 유토피아가 존재할까? 단언컨대 없다. 그것은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유토피아의 부재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건설할 것을 윤리적 명령으로 부과한다. 우리는 바로 이 항구적인 지령 속에, 저 먼 과거로부터 기입되고 풍화된 구원의 약속 틈에 살아가는 운명을 마주한다. 그것은 가엾으나 계속된다, 계속되어야 한다, 계속되고 만다. 《크리틱-칼》은 한동안 그 명령에 충실하게 복무해왔다.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말한다. 《크리틱-칼》에 수많은 필자들이 참여하고 함께한 이상 매체는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매체는 아득한 옛부터 홍태림을 초과하여 유토피아를 향한 몸짓을 보내왔다. 때문에 결정은 번복되어야 한다. 이는 당신의 반성적 능력을 신뢰하기에 보내는 공개서한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바라는 것은 홍태림과 《크리틱-칼》의 대자적 분리이다. 그 분리는 이 원고가 《크리틱-칼》에 게재되고 홍태림이 관련된 입장문을 내놓을 때를 기점으로 할 것이다. 제반의 요구가 묵살되고 《크리틱-칼》이 침묵 속에서 다른 원고들만 취사해서 게재한다면, 그 원고들은 태생부터 불임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세상을 볼 것이다. 사전에 어떤 위협의 소지도 없도록 세탁된 백색 언어들만 검역소를 통과할 것이다. 불온함이 없는 언어가 언어밖에 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고 자신할 자 있나? 《크리틱-칼》은 말의 산실에서 무덤으로 타락하며 언어를 도축하고 그 토막을 지하에서 무심히 방치하게 될 것이다. 반면 지상에선 어떤 언어도 허용하고 있다는 가공된 신화를 설파하는 사이비가 될 것이다. 그때 그의 뒤편에선 광배가 아닌 언어의 시취가 끝끝내 감춰지지 못하고 기어 나올 것이다. 가진 것이 언어밖에 없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막고 싶은 상황이다. 홍태림의 결정을 기다리며 검열에 관해 인터뷰했던 그 자신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예전에 아트페어의 일환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SeMA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 : 공허한 제국⟫이 열렸을 때, 전시 총감독과 서울시립미술관 전 관장이 홍성담 작가의 <김기종의 칼질>을 철거한 사건이 있었죠. 그 문제를 비판하는 글을 썼었는데, 총감독은 저의 SNS를 차단하는 수준의 반응을 보였고, 서울시립미술관 전 관장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시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었던 분이 그런 예술탄압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고, 그것에 대한 공개적인 해명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3배수에까지 들어갔더라고요.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한국 미술계가 예술 검열에 참으로 관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씁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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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zineseminar.com/wp/issue04/04-drain/

 

하수관에 그냥 흘려보내도 된다 (You can just pour it down the drain) – zinesemi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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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연, 신현진, 안진국 지음, <비평의 조건>, 2019, 351p.